사명의 사변
유성 작가님
죽었어?
기억이 퇴행했다. 그녀는 힘이 풀려버린 성대를 주체하지 못했다. 근육에 분배되던 힘이 중력으로 치환되어 흰 발목을 잡아 끌었다. 그녀는 토양 속으로 끌려 내렸다. 쏟아지는 아스팔트의 열기가 그 위를 아른아른 맴돌았다. 불과 몇 분 전의 일이 마치 영화가 상영되듯이 그녀의 시야를 차지했다. 흙의 퍽퍽한 향이 그녀의 콧속을 찔렀고, 귓가를 타고 흘러 반고리관까지 푸르르고 파라란 수풀의 파도 소리가 철썩 울려쳤다. 그의 죽음을 인정하던 그…, 말은 제멋대로 아늑한 집을 박차고 나갔다. 하늘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녀의 심장의 무게는 훅, 상승했다. 죄책감으로 대동맥의 구멍을 꽈악 틀어막았다. 혈액 순환의 리듬이 무너졌다. 잔잔하고 반복적인 곡조의 붕괴.
김각별, 안 돼.
네가 진짜, 죽어버리면 어떻게 해. 잠뜰은 이 엿 같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용했다. 한 명의 숨소리만이 그 공간의 음파를 모조리 독점하고 있었다. …늘 이런 상황을 예상해왔다. 각별과, 저는 늘 죽음을 각오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삶을 살아왔다. 그들의 집은 늘 깔끔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무채색의 가구 위에 짙게 가라앉은 먼지가 그들의 처지를 대변했다. 그 어느 곳에도 정을 붙일 수 없었다. 아니, 정을 붙이지 않았다. 가장 죽음과 가까운 이들을 꼽으라고 한다면 국가의 모든 민간인들은 그들의 이름을 읊어댈 테니까. 그렇기에 내일이 없는 듯 등판을 맞대며 서로의 목숨을 지켜낼 수 있던 거니까. 그렇지만, 막상…. 동행의 부재를 알아차리고 나니, 동료의 이탈을 받아들이고 나니 숨이 멎어왔다. 제 손목을 잡아끌고, 그 반동으로 대신 그 자리 위를 차지했던 각별의 마지막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순간을 크로키로 담아낸 듯 확실하고도 추상적인 이미지가 뇌리의 중심을 강타했다. 끝이 뭉툭해진 연필이 사고의 흐름을 툭, 끊어 놓았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가 조금 더 조심했더라면, 제가 조금 더 뒤를 살폈더라면. 각별이 제 몸을 날려 그녀를 사지에서 몰아낼 필요는 없었다. 제 발로 지옥의 입구를 찾아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제 팔을 하데스의 아가리에 쑤셔 넣을 필요는 없었다. 왜, 이렇게 된 것이었나. 누가 이러한 전개를 예상하였겠는가. 누가 이러한 전개를 구상하였는가. 각별이 제 몸을 불사 질러 그녀의 앞을 가로막을 줄, 누가 감히…, 추측할 수 있었을까.
현재의 길목을 앞지른 채 눈앞으로 과거의 환상이 펼쳐졌다. 쭈욱. 각별은,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야, 정신 똑바로 차려라. 너 죽을 거 같고 그러면 난 너 버려야 한다.”
“아, 오케이. 오빠나 정신 똑바로 잡아….”
그래, 그래. 분명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문자의 흐름이었다. 그는 늘 그랬듯 무심했고, 그녀는 늘 그랬듯 덤덤했다. 제 죽음을 각오했으니까. 항상 하루의 끝을 마무리하기 전, 유서를 써 내리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이 직종을 선택한 대가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사살하기 위해서는 저 또한 사살해야 했다. 제 존엄성을 발치에 내려놓고서 타인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이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였고, 역할이었고, 운명이었다. 교향곡의 웅장하고 묵직한 가락이 흘러나왔다. 쾅, 내리친 피아노의 비명이 들렸다. 연결된 줄이 연이어 끊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제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이, 타인의 죽음에 무덤덤해졌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었다. 총탄을 발사한 뒤 제 손목을 아리게 울려오는 반동의 느낌이 싫었다. 제게 살인자의 죄목을 입증하는 그 진동이 얄미웠다. 칼끝으로 살을 파고드는 전율이 전해질 때면, 제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토악질을 쏟아내고 싶었다. 그녀는 늘상 생각했다. 이 일이 나에게 걸맞은 일인가, 이 일이 나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목표인가. 자리에 주저앉아 숙고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총기를 손질하고, 검은 모자를 눌러쓸 때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죽음에 대한 죄책감. 결단코 사라지지 않던 한 가지. 그런 이가, 그런 사람이 제 목숨을 위해 희생한 둘도 없는 동료의 시신을 바라볼 준비를 하겠다 여긴 적이 있겠는가. 그의 죽은 눈을 바라볼 준비를 했었겠는가.
항상 희생은 제 몫이라 여겨왔다. 누군가가 목숨을 희생해야만 한다면, 사체는 그녀의 몫이었으니까. 그게 제 사명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제가 각별의 죽음을 마주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안도했다.
그러나, 그는 제멋대로 그 자리를 가로채었다. 각별은 겁이 없었다. 그의 심장은 공포에 잠식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행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의 이성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의 사명에는 단 두 글자만이 있었다. 생존. 우선이었다. 창조주께서 정성스레 부여하셨던 숨결의 노래를 억지로 끊어 놓을 수는 없었다. 가늘고 길게, 살자. 참으로도 아이러니했다. 유서를 쓰는 것이 의무인 사람이, 가늘고 길게 살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낮게 풀어헤친 갈색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던 붉은 레이저를 본 순간 그의 몸은 사명에 반했다. 본성을 재생했다. 자유 의지를 찾았다. 길게 늘어트린 검은 머리칼에서 핏물이 뚝, 뚝 흘렀다. 그의 뺨에는 혈흔이 말라붙었다. 장미 꽃잎을 말려 그의 검은 상의 위로 떨어트렸다. 툭, 툭 *黑이 흘렀다. 검고 붉은 액체가 시멘트 위를 뒤덮었다. 하늘의 기류를 타고 먹구름이 쏟아졌다. 그의 세상이 *黑으로 점멸했다. 그에게 달려오는 잠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억이 퇴행했다.
아, 죽었나.
숨이 멎었다. 세상의 노란 빛을 모두 집어삼킨 듯 쨍하게 빛나던 노란 홍채가 눈꺼풀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모래사장 위에 남겨졌던 발자국이 잔잔한 파도에 집어 삼켜졌다. 생명의 근원이 되었던 원시의 바다는 어디론가 타락하고, 생명을 앗아갈 뿐인 증오가 남아있었다. 우주를 온전히 담아내는 바다의 물빛은 흑색이었다. 바다라기보다는…, 물과 생물이 모두 증발해버린 사해를 표방하는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그 위를 유유히 떠다니고 있는 탄피의 이름은 절망이었다. 그들의 위에서 깜박거리는 노란 전구가 반쯤 깨져 있었다. 유리 가루가 닳아버린 수명에 곱게 흩날렸다. 고왔다. 참으로 곱고 고왔다. 각별은 눈을 감았다. 잠뜰은 눈을 떴다. 회색 바닥의 일부를 차지하고 길게 드러누운 남성의 위로, 푸른 그림자가 겹쳐졌다. 죽어버린 동료의 발끝에 무릎을 굽혔다. 다시금 눈을 감았다. 기억을 퇴행시켜 모든 순간을 되새겼다. 그 주마등을 제물로 삼아 그에게 축복을 빌었다. 스튁스 강을 건널 자에게 금화를 바쳤다.
“…고마웠어.”
사명을 지켜왔기에 살아있을 수 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사명을 거부했다. 그것이 그의 의지이건, 타인의 의지이건. 그들은, 그들은….
사명을거부한이들의최후에는죽음만이남아있다는것을알지못했다.
*黑(검을 흑)
10년을 함께 해온 동료가 사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마왕이었던 건에 대하여
"죽었나?"
"안 죽었으니까 건들지 마라"
"아 알겠어. 진짜 깐깐하다니깐"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피며 으으윽 하고 신음을 뱉은 공룡을 한심하게 바라본 각별이 말했다.
"어차피 쟤넨 절대 안 죽는 거 알잖아? 한 시간 뒤에나 일어날 놈들 굳이 깨우지 마라고."
"마법으로 머리를 으깨놨으면서 한 시간 뒤는 무슨. 저것들이 아무리 끔찍한 마물이긴 해도 재생 능력이 그 정도는 아니잖아?"
"그냥 좀 닥쳐."
기어코 각별이 휘두른 기다란 마법 스태프에 한 대 맞은 공룡이 욱신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며 끙끙거렸다.
"됐고 짐이나 챙겨. 저건 회복이 빠른 종류라서 한 시간은 아니라고 해도 두시간 뒤에는 반쯤은 회복될 테니까."
네네 알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린 공룡은 폭탄을 목표물에 더 잘 맞히기 위해 벗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망토를 뒤집어썼다. 온몸을 가리고도 모자란 건지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린 망토의 긴 천이 불편한 건지 몇 번이나 잡아당기고 매만지다 어느 정도 헐렁해지자 그제야 만족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를 보던 각별 역시 옷차림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만큼 근접전에 불리하기에 얼굴을 알리지 않기 위해 깊게 눌러쓰고 있던 망토의 모자를 벗고는 망토가 펄럭이지 않게 허리를 꽉 묶고 있던, 황금색으로 반짝이면서도 초록빛이 일렁이는 각별 고유의 마력이 담긴 별 모양의 보석이 달린 끈을 풀었다. 그리고 모자를 벗어 흩날리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그 끈으로 높고 깔끔하게 묶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마물들은 각별을 알아보긴 힘들 것이다.
한참이나 옷을 정리하던 각별이 문득 생각난 듯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서 진짜로 고향에 들릴 거야?"
그 말에 옷매무새가 흐트러지진 않았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던 공룡이 아, 하고 탄식을 뱉었다.
"그래야지. 10년 만에 다녀오는 거잖아."
"그래도 그렇지... 하필 요즘 같은 시기에 고향에 들르겠다니, 너도 제정신은 아니야."
"사돈 남 말 하긴... 걱정 말라니까? 고향에 들리는 건 그냥 지나가는 길이어서 잠깐 들리는 거라고. 본 목적은 각별님꺼 스태프를 맡겨보는 거잖아. 위험하지 않을 거야."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말하는 공룡에 각별은 어떤 대꾸도 하지 않고 그에게 들고 있던 스태프를 던졌다. 바닥에 떨어질 뻔한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잡아챈 공룡이 미쳤어? 라며 소리를 지르자 각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잘 챙기기나 해."
"각별님 진짜 죽고 싶어?'
"어쩌라고"
"와... 진짜 죽이고 싶다..."
헛웃음을 뱉은 공룡은 결국 주섬주섬 악기 가방을 열어 마법 스태프를 집어넣었다. 저렇게 말하긴 해도 각별이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기에 그런다는 것을 알기에 뭐 말을 보탤 수도 없었다. 물론 걱정만 있는 게 아니라 공룡의 아주 짧은 외박에 같이 가자는 각별의 제안을 거절한 것에 대한 뒤끝도 포함된 것 같기는 했다.
"바로 갈 거지?"
"그래야지. 방금 마물들도 기절시켰으니까 지금부터 출발해야 각별님 혼자 있을 때 떼거리로 몰려오진 않을 거 아냐?"
그렇긴 하지라며 중얼거린 각별이 고민하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다 악기 가방을 멘 공룡을 불렀다.
"정공룡, 이거 가져가."
"어? 이게 무슨..."
"텔레포트 마법을 걸어놓은 목걸이야. 한번 사용하면 효력을 잃긴 하지만 우리 집 거실로 바로 이동할 수 있으니까 위험해지면 사용해."
"각별님... 웬일로 이런 일을 해주는 거야?"
감동받은 표정을 과하게 연기하며 손으로 입을 가리는 공룡에 각별은 소리를 질렀다.
"얼른 가기나 해!!!"
"응 나도 고마워! 다녀올게!"
밝게 웃으며 혹시라도 각별이 쫓아오기라도 할까 봐 급하게 다른 마을로 향하는 길로 뛰어가는 공룡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각별은 한숨을 쉬었다. 쫓아가봤자 힘만 빠질 뿐이다. 집이나 가야지.
………………
공룡이 고향으로 향하고 혼자 도시로 돌아온 각별은 평소에는 조용하고 차분한 도시 곳곳이 시끄럽게 변한 것을 느꼈다. 공룡을 제외하곤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결국 누구에게 물어보지도 못한 채 집으로 향하던 그는 공룡과 각별이 사는 집의 옆에 사는 가족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참 허무하고 별거 없었다.
천년의 한 번씩 나올까 말까 한 용사가 마계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이 도시에 들린다는 것이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네. 각별은 겨우 그런 이유로 이렇게 흥분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저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괜찮은 건 용사는 마물을 완전히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기에 도시를 미친 듯이 습격하려 해 각별과 공룡이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주변의 마물들을 처리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물들은 각별과 공룡에 의해 이미 온몸이 찢기고 박살 났기에 용사가 머무는 기간 동안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인생에 도움이 안 돼 정말... 용사를 떠받드는 이들이 안다면 분노할 생각들을 아무렇지 않게 떠올리며 각별은 이불 속에 몸을 눕혔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에 그는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잠에 들었다.
……
[마물은 몇만 년 전 인류가 가꿔오던 이 세계에 갑자기 나타난 존재이다. 마왕이라 불리는 마물들의 왕은 수도 없이 많은 그것을 이끈 채 인간 세계에 왔고 그로 인해 죄 없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인간들은 저항하였으나 온몸이 으깨지고 뇌가 부서져도 몇 시간 후에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히 일어나는 죽지 않는 마물들을 물리칠 순 없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그것들은 결국 커다란 나라 몇 개와 작은 나라들을 없애버린 뒤 어떤 공간들에 마계와 인간계를 이어놓는 포탈을 설치하고 돌아갔다. 그 포탈에선 끊임없이 마물들이 튀어나오고 돌아오길 반복했으며 사람들이 겪는 피해는 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물을 완전히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유일하게 이 세계를 구할 희망이 된 그는 용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용사는 포탈을 넘어가 마왕을 죽이라는 왕의 명을 받고 포탈로 인해 마력이라 불리는 것들을 다룰 수 있게 된 사람 중 가장 많고 강력한 마력을 가진 사람과 나라 안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마계로 향했다.
하지만 마계로 향하는 포탈을 들어간 일행들은 용사를 포함한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몸의 일부가 닿자마자 몸이 순식간에 타올라 재로 변해버렸다. 이는 7번째 용사가 나타난 순간에야 원인이 밝혀졌는데 포탈에 흐르는 위험하고 악한 마력을 견뎌낼 수 없는 마력의 그릇을 가진 이들은 몸이 견디지 못한 마력이 밖으로 분출되기 위해 그들을 태워버린다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동료의 반 이상을 잃은 용사는 당황했으나 그들을 애도할 틈도 없이 몰려오는 마물들을 물리치며 마왕이 사는 성에 도달했다. 하지만 마왕은 그들에 비해 수십 배, 혹은 수천 배 이상 강력했고 마왕의 손짓 한 번에 용사를 제외한 이들은 전부 사지가 찢겨 죽었다. 용사 역시 작지 않은 상처를 입어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보던 마왕이 말했다.
"제안을 하나 하지."
"내 동료들을 모조리 죽여놓고는 제안이라니,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지?"
"난 백 년도 채우지 못한 채 죽어버리는 너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길고 지루한 시간을 살아왔다. 너무 오랜 시간이었기에 어떤 흥미도 감정도 가지지 못한 채 살아온 게 수십만 년이지. 그래서 지옥 같은 지루함에 벗어나기 위해 너희의 세계를 부순 것이다."
"...뭐?"
"하지만 이젠 그것조차 지루해져 인간계를 완전히 부순 채 떠나려 했으나 네가 내 흥미를 돋구었어. 그렇기에 제안한다. 너의 자손은 마물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될 것이고 왕은 용사가 나타날 때마다 나를 죽이라고 명 할 것이다. 만약 앞으로 태어날 그 용사들 중 한 명이라도 날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더는 인간계를 건드리지 않고 완전히 떠나겠다."
"수락할 건가?"
용사는 마왕의 제안을 수락했고 마왕은 미소지었다. 그리고 용사가 눈을 깜박이자 그는 왕궁의 한복판에 떨어져 있었다. 수십 명 사이에서 혼자 살아남은 용사는 왕에게 마왕에게 겪은 모든 것을 말하고 마왕의 제안을 전달했다. 왕은 분노했으나 이내 진정했고 용사와 그 후손을 왕실에서 생활하게 하도록 결정했다.
용사의 자격은 처음에는 자식에게 나타났으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타인들과 피가 섞이고 섞여 지금에는 수천 년에 한 번씩 그 자격을 가진 이가 태어났다. 그 자격은 첫 번째 용사와 닮은 외모였는데 모든 용사는 여자였으며 와인 빛이 도는 갈색의 머리카락에 청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왕을 만난 지금까지의 용사들이 설명하는 마왕의 모습은 모두 달랐는데 가장 최근에 나타난 용사가 본 마왕은 형형하게 빛나는 금색의 눈과 칠흑같은 흑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마왕의 측근들은 인간보다 못한 지능을 가진 대부분의 마물들과 다르게 아주 뛰어난 지능과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간들 사이에 숨어지내기도 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는 이게 끝이야?”
“어쩔 수 없잖아요... 정보가 부족한걸...”
“하... 빌어먹을... 황실에 그 마력을 견딜만한 마법사가 없다는 게 말이 돼? 이 책에는 나올 것 같았는데 마법사에 관한 언급이라곤 한 줄 밖에 없다니...”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그 도시에 마법사는 아니라도 포탈의 마력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길 바라야지.”
그러길 바래야지라고 중얼거린 잠뜰은 책을 휙 덮고는 촘촘하고 작은 글씨를 보느라 욱신거리는 눈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치유 마법은 꼭 필요한데..."
고민이 많아 보이는 잠뜰을 보던 수현과 라더는 서로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덜컹거리는 마차는 그런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짜증나게도 편안했기에 수현은 눈을 꺽 감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미래가 닥치기 직전이었다.
……
각별은 숨을 들이쉬고는 좁은 골목길 사이를 걸어갔다. 용사와 그의 동료들이 도착한 뒤부터 도시는 마왕을 죽이는 걸 바라는 의미의 축제를 벌이는 사람들과 그 기회를 잘 잡아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거나 자만심에 빠져 용사의 눈에 들기 위해 안달을 내는 이들로 인해 시끄러웠다. 게다가 이번에는 황실 내에 포탈을 건너갈 만큼의 마력 내성이 있는 마법사가 없어 함께 마왕을 물리치러 갈 마법사를 구하고 있었기에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용사가 어디에 있든 무작정 달려드는 마법사들이 많았다. 남의 불행에 무관심한 각별마저 용사가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용사의 숙소에도 침입하려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들어가면 자길 봐줄 거라고 믿는 걸까? 그는 사람들이 참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지금 이 도시를 공룡이 봤다면 '왜 각별님은 안 저래?'라고 하겠지만, 각별은 글쎄, 용사와 함께하는 여행이 영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혼자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것을 굳이 죽을 위험까지 감수하며 살아남아야 할까? 그의 친절은 도시의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죽기보다 싫어했던 마법까지 써가며 마물들을 잠시나마 죽여놓는 것이 최대 한계치였다. 그것 역시 공룡의 부탁으로 인해 허락한 것이었지만 친절을 베푼 것은 맞지 않는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골목길을 빠져나온 각별은 먼지가 묻은 망토의 끝을 툭툭 털었다. 내일쯤이면 공룡이 돌아올 것이다. 아마 배고프다고 찡찡댈 것이 분명하니 미리 식재료를 사놓기 위해 시장으로 향했다. 아니 분명 그럴 생각이었다.
각별이 도착한 곳은 시장이 아니라 상류층이나 돈이 많은 부자들이 살아가는 마을이었다. 그는 도시 내에서도 가장 안전하고 화려한 이 공간을 싫어했다. 얼굴을 와그작 일그러뜨린 각별은 마을을 나가기 위해 출구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출구는 보이지 않았고 불안해지기 시작한 각별은 쓰고 있던 망토의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 쓰고는 급하게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헤매던 각별은 마침내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들었다. 드디어 출구를 물어볼 수 있다는 희망에 얼굴이 환해진 채 그곳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던 각별의 발걸음을 멈춘 것은 오만하고 자만감에 빠져있는 한 목소리였다.
" 왜 날 동료로 삼지 않는 거지? 난 버러지 같은 지금의 네 동료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야! 그따위 것들은 받아들인 주제에 감히 날 무시해? "
그 익숙하고 짜증나는 목소리의 주인은 이 도시 최대의 권력과 재력을 가진 이의 아들이었다. 또한, 동생이었던 덕개를 죽게 만들고 자신을 쫓아낸 살인자였다.
각별은 분노로 인해 날카롭게 튀어나오려는 마력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고는 손가락을 튕겨 몸을 숨겼다. 눈치가 어느 정도 있다면 눈치챌지도 모를 가벼운 마법이지만 아마 그 자식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현재 그는 마법사들의 가장 소중한 물건이라 불리는 스태프도 들고 있지 않았으나 어차피 각별이 그를 죽이거나 다치게 만들기엔 쓸모도 없는 것이었으니 그는 망설임 없이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발을 옮겼다. 가까이 갈수록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화를 참기 위해 깨물던 입술에서 피가 새어 나온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각별은 끊임없이 들려오던 멍청한 말들을 단박에 끊어버린 한 목소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당신은 자격이 없어. "
" 뭐? "
“ 용사가 선택한 이들을 그런 식으로 깎아내리면서 목숨을 건 여정에 참여하길 바란다고? 도련님, 미안한데 우리가 하려는 건 네 생각처럼 쉽고 만만한 게 아니야. 능력도 마력도 떨어지는 주제에 아비의 권력으로 찬양받으며 살아오던 당신은 곧바로 나가떨어질 게 분명해. "
가슴까지 오는 와인빛의 갈색 머리카락과 청회색의 눈을 가진 목소리의 주인이자 용사일 게 분명한 이가 말했다. 용사의 말에 잠시 부들거리던 사람이 입을 열며 무어라 말하였으나 그 말들은 용사에 의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잘려나갔다. 짜증이 난다는 듯 툭툭 말하는 용사에 각별은 입꼬리가 씩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어우, 속 시원해라.
용사가 그 사람에게 독설을 뱉는 걸 구경하던 각별은 딸랑, 하는 맑은 종소리를 들었다.
뭐? 말도 안 돼. 분명 습격을 오기에는 회복할 시간이 부족할 텐데. 갑자기 힘을 줘 핏줄이 도드라진 손을 들어 따닥 손가락을 부딪친 각별은 헛웃음을 뱉었다. 미리 하늘에 띄워놓았던 별 모양의 마력석으로 보이는 마물들의 숫자는 인생의 27년 중 10년을 마물을 죽이는 데 사용하던 그조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나고도 끔찍한 수였다. 하필, 하필이면 공룡이 없을 때 이런 습격이라니... 용사의 일행엔 마법사는커녕 치료 마법이 가능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도시 내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 도시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놓은 1차 방어막이 깨져도 피해 하나 입지 않는 곳이었다. 결국엔 또 내가 해야 하는구나?
각별은 한숨을 푹 쉬곤 몸을 돌려 마을의 출구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멀리서 죽이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아마 길을 한 번이라도 잘못 든다면 수백 명은 죽어 나간 후에야 마물들을 쫓아낼 수 있을 테고 광범위한 마법을 쓰기엔 도시에 들어가 있던 마물 뿐만 아니라 도시 안의 사람들까지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 일만은 벌어져선 안 된다. 그는 평소엔 믿을 수 없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만큼은 훌륭하게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자신의 길 찾기 실력을 믿었다.
그리고 용사는 자신에게 달라붙던 그 사람에게 말하던 것을 멈추고 수현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 방금 간 사람 쫓아가 봐. "
수현은 빙그레 미소 짓더니 각별이 뛰어갔던 길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진 수현을 본 용사는 자존심이 상해 부들거리는 사람을 무시한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저건 라더가 처리할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
각별은 숨이 부족해 아파오는 가슴을 무시한 채 숲을 바라보았다. 그가 애용하는 좁고 복잡한 골목길은 숲과 곧바로 이어져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숲과 골목길의 경계선에 다가가 보자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금에 각별은 표정을 와그작 일그러뜨렸다. 이대로면 몇 분 뒤 깨지고 말 것이다. 얼마 전까지 각별이 있던 그 마을로 도망치기 위해 비명을 지르며 뛰어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 사이에서 내쳐진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자신은 안전할 것이며 마법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각별은 그의 마력을 집어넣어 만든 특별한 마력석을 하늘로 향해 던졌다. 그리곤 마력석과 자신의 위치를 바꾼 뒤 몸을 띄운 채 아래를 바라보자 상황은 각별의 생각보다 더욱 심각했다. 막상 눈으로 보자 어마무시한 숫자였다. 게다가 크게 금이 가있는 보호막 사이를 억지로 쑤셔 들어가 숲과 아주 가까운 사람들을 해치고 그들의 시체를 먹는 마물들의 수 역시 적지 않았다.
각별은 새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그것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여러 가지 뱉기 시작하자 하늘에 황금색의 밝고 커다란 마법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고대의 것이 분명한 언어들이 새겨져 갈 수록 마법진의 크기는 더욱 커져갔고 환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도망치던 사람들의 눈길조차 한순간 빼앗을 정도로 밝다 못해 아름답고 위압감이 들게 만드는 마법진은 마침내 마물들이 있는 곳을 전부 뒤덮을 정도로 커졌다. 평소 창백하고 죽은 사람 같던 각별의 피부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으나 각별은 무언가 끔찍한 행동을 하는 착한 아이가 된 것처럼 불쾌함과 죄책감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그런 그의 표정을 볼 수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람에 의해 모자는 진작에 벗겨졌으며 묶고 있던 끈마저 풀리기 직전인 것처럼 흔들려 화려하게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주황빛과 초록빛이 돌기 시작하는 황금색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수현과 뒤늦게 도착해 대마법을 펼친 이를 찾다가 각별을 발견한 잠뜰과 라더를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마침내 각별이 눈을 깜박이며 손을 아래로 향하자 마법진에서 순수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번개와 형태가 비슷한 것들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것들에 맞은 마물들은 순식간에 온몸이 불타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래 봤자 죽지는 않겠지만 4일 뒤에나 몸이 재구성될 것이었기에 각별은 마법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을 바라보던 수현은 감탄했다. 깨끗하고 선하며 정제되지 않은 마력은 마물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선사한다. 그럼에도 마법사들이 그것을 이용할 수 없는 이유는 대마법사 정도의 수준이 아닌 이상 피를 타고 흐르는 평범한 마력이 아니라 몸의 아주 깊숙이 묻힌 순수 마력을 끌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라 안의 마법사 중 대부분은 순수 마력을 사용하지도 못한 채 죽는 경우가 다반사임에도 저 사람은 그 순수 마력을 끊임없이 끌어내며 마물들을 처리하는 것 아닌가. 수현 역시 검술과 은신의 경지의 끝까지 도달한 이였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저 사람과 함께라면 마왕을 죽일 수 있을 거야.
마물들의 알아들을 수 없지만, 비명으로 예상되는 소리가 들려오기를 한참, 각별은 마침내 마법을 거둬들였다. 10년을 넘게 순수 마력은커녕 기본 마력마저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채 기본적이고 위협적이지 않은 마법만을 이용해 온몸에 쌓이고 쌓여 넘쳐버린 마력이 오랜만에 방출구가 생기자 온몸을 활기 넘치게 돌며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참아. 참아야 해. 내가 어찌 감히 마법을 쓸 수 있어? 내 동생을 죽게 만든 그 마력을 내가.
각별은 강하게 몰아치는 바람에 휘청거리는 몸을 마력으로 띄우는 것을 멈췄다. 어차피 죽지 않을 정도의 높이였고 다친다 하더라도 바로 치료할 수 있으니 문제는 없었다. 눈을 감은 채 떨어지는 각별을 누군가 받아냈다.
" 미쳤다고 그걸 떨어져요?? "
고함치는 큰 목소리에 슬며시 눈을 뜬 각별은 자신을 받아낸 새빨간 머리와 사나운 눈매를 가진 남자와 빠르게 뛰어온 토끼 귀에 단정한 옷을 입은 남자, 그리고 올라갈 입꼬리를 가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쳐다보는 용사를 바라보았다.
몇 초간 멍하니 용사를 바라보자 그가 밝게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 저기, 당신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요? "
각별은 그 순간 한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인생이 종 치는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