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애파 작가님
…죽었어?
비릿한 혈흔이 코끝을 맴돈다. 붉은 빛 가득 머금은 혈흔은 어느덧 제법 큰 웅덩이로 아스팔트 바닥에 자리매김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고등학생 박덕개는 오늘 사람을 죽였다. 정확히는 사람을 밀쳤던 것 뿐이다. 운이 정말 지지리도 없었다. 물론 쌤통이라는 마음이 앞섰다. 고등학교 2학년 박덕개를 지난 2년간 지독히도 괴롭혀왔던 싹수없는 양아치 새끼가 죽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박덕개의 지갑에 빨대를 꽂으러 골목으로 불렀다 봉변을 당했다. 죽은 사람도, 죽인 사람도, 모두 운이 더럽게도 없었다.
박덕개는 한참을 생각했다. 112에 신고하면 사람을 죽였으니 깜빵행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대로 나 몰라라 하고 도망치면 다음날 지나가던 누군가가 신고를 하겠지. 그럼 저 자식의 몸을 조사해서 내 지문은 찾아낼 것이다. 그럼 뭐다? 깜빵행이다. 열여덟에 칙칙한 죄수복을 입고 살아갈 자신이 없다. 집에 있는 하나뿐인 혈육 가슴에 대못을 박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살아남으려면, 이미 죽어버린 사체를 숨겨야 한다. 박덕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람도 죽였는데 이제 못할게 뭐가 있겠어. 넌… 벌 받은 거야. 내가 죽인 게 아니라 이건 모두 네 업보일 뿐이야.
비위 약한 박덕개는 연신 헛구역질을 해대며 혈흔 범벅인 사체를 질질 끌었다. 골목 뒷산으로 끌고 올라갔다. 누군가 두고 간 삽으로 땅을 파냈다. 대충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로 구덩이를 파내 그 안으로 온기 없는 사체를 넣었다. 박덕개는 떨리는 손으로 파낸 흙을 다시 덮었다. 중간에 삽도 묻어버렸다. 흰 운동화가 흙빛 운동화가 될 때 까지 밀었다. 그리곤 도망치듯 산에서 나왔다.
다시 골목으로 돌아왔다. 점점 메말라가는 혈흔이 아주 장관이었다. 급한대로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들었다. 매점 셔틀때문에 가방에 처박아두었던 물을 여기다가 쓸 줄이야. 가방에 생수만 있는지 생수병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박덕개는 어떻게 이 피바다를 정리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저 물을 뿌려서 구석으로 밀었다. 그게 전부였다.
박덕개는 와중에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열었다. 넘쳐나는 종잇장에 박덕개는 입술을 짓이겼다. 잘 먹고 잘사는 집 새끼가 돈을 뜯고 다닌다는 게, 너무나도 역겨워서 제정신일 수 없었다. 박덕개는 이제 혈흔 가득한 손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양아치들을 피해 다녔던 지름길 대신 빙 돌아가는 넓은 대로변을 택했다. 하염없이 걸었다. 걸어온 길도 다시 걸었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살인… 티비에서나 보며 미친놈들이라고 혀를 차던 지난 날의 박덕개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럼 이제 너도 미친놈인 거네? 너도 죽일 놈인 거네? 이제야 서서히 실감이 나고 있었다. 온 몸에 피가 거꾸로 솟구친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빠르게 뛰던 심장은 이제 왼쪽 가슴팍에 달려있는지 머리통에 달려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쿵쿵 울려대는 소리가 온몸을 휘감았다.
박덕개는 후드집업 모자를 눌러쓰고 내달렸다. 턱끝까지 숨이 차올라서 멈춘 곳이 하필이면 골목길이었다. 눈앞에 혈흔 자국 가득한 아스팔트 바닥이 아른거렸다. 첫사랑도 아니고 피 바닥이 눈앞을 가득 채우니 사람이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자기 합리화를 한다지. 아까 죽은 그 자식은 박덕개의 정신을 죽였다. 일분일초도 박덕개가 편히 있는 꼴을 못 봐주겠다는 건지 하루하루 박덕개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박덕개는 자신의 정신을 갉아먹은 그 자식의 육체를 죽였다. 그러니까, 나는 정당방위를 한 거야.
죽음의 정의는 하나가 아니었나. 죽음과 죽음을 서로에게 갚아주었을 뿐이다. 육체가 살아있으면 온전히 살아 숨 쉬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으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사람은 살아있는 것인가. 영이 떠난 육체는 그저 껍데기일 뿐이 아닌가.
인적이 드문 좁은 골목길을 지나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혹여 누가 볼까 불안한 박덕개는 혈흔 가득한 손을 집업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집에 가서 누나를 어떻게 봐야 하나.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박덕개는 생각했다. 수 많은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돌렸지만 답은 하나였다. 박덕개는 혈흔 가득한 손대신 팔꿈치로 2층을 눌렀다. 터덜터덜 걸어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소파에 바람풍선 마냥 드러누워 있는 박잠뜰이 보였다. 왔냐? 응. 누나… 박덕개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박잠뜰을 쳐다보며 말했다.
누나, 나… 사람을 죽였어.
개미는 기어가고요
용덕출 작가님
죽었어?
잠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허공을 감돈다. 쌉쌀하니 혀가 떫은맛이다. 뒤집힌 거미가 둘의 눈앞에 자리한다. 덕개는 개미를 지켜보다 놀란다. 순간적으로 찬 숨을 들이켠다. 이내 컥컥대는 덕개의 앞에 그림자가 진다. 덕개가 짧은 한숨을 내쉰다.
개미는 기어가고요
덕개가 앞에 기어가는 개미 짓밟는다. 작아서 아무도 눈치 못 챈다. 그럼 그제야 참고 있던 숨 푹 내쉰다. 손목에 찬 시계 보며 동아리 시간까지 남은 시간 확인하며 손톱 뜯는다. 점심시간은 향초 냄새가 그리워질 즈음이다. 덕개는 파아란 하늘 흘낏 본다. 구름이 둥실 떠 있고 회색 그림자까지 져 있는 것이 향초 그을림 같아 고개 흔든다.
눈앞에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가 수십 마리 보인다. 덕개는 애써 눈을 돌린다. 커다란 것이 하늘을 가린다. 덕개의 걸음이 빨라진다. 교실에 도착해 문을 닫고 나서야 심장 떨림이 조금 나아진다. 벽에 기대 책에 머리를 박고 있는 덕개에게 잠뜰의 말이 전달된다. 동아리로 와라. 덕개야. 그 목소리에 덕개 책 덮고 복도로 나간다.
동아리방에는 실수로 끄지 않은 향초 냄새가 흥건하게 풍긴다. 덕개는 커다란 숨을 들이쉰다. 폐가 부푼다. 덕개의 느린 숨이 바닥에 닿았을 즈음, 잠뜰은 창문 밖을 본다. 하늘은 금세 구름으로 가득 찬다. 창틀에 기어가는 개미가 줄줄이 이어진다. 도착지는 덕개의 발밑이다. 개미는 향초를 끄며 가만히 서 있는 덕개의 슬리퍼를 건드린다.
개미들은 이득고 덕개의 발을 타고 올라간다. 간지러운 느낌이 덕개를 감싼다. 덕개는 새로 꺼낸 향초를 떨어트린다. 마른 입술로 잠뜰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잠뜰은 책상을 닦던 걸레를 놔두고 덕개의 발을 본다. 검붉은 색의 개미들이 우글거린다. 덕개는 개미집에 잠식당한 것 같은 모습으로 눈을 감는다. 절대로 보면 안 돼.